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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학

각국이 IFRS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른 이유

1. IFRS의 글로벌 확산과 그 이면 

국제회계기준(IFRS, International Financial Reporting Standards)은 전 세계 회계의 공통 언어를 만들겠다는 목표로 도입되었다.
투자자의 국경 간 자본 이동이 활발해지면서, 재무정보의 비교가능성이 필수적 과제로 떠올랐다.
이 때문에 2000년대 초부터 유럽연합(EU), 아시아, 남미 등 여러 국가가 IFRS 도입을 추진했다.
하지만 실제 도입 속도와 수준은 국가마다 극명하게 달랐다.
유럽은 2005년 일괄 도입을 단행했지만, 미국은 아직도 자국 기준인 GAAP을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중국·인도 등은 ‘부분 채택(partial adoption)’ 또는 ‘수용형(endorsement approach)’을 택하고 있다.
이처럼 회계기준의 글로벌 통일이 더디게 진행되는 이유는,
회계가 단순한 기술적 규칙이 아니라 국가의 제도적·정치적 선택이기 때문이다.
각국의 경제발전 단계, 법체계, 자본시장 구조, 문화적 가치관이 IFRS 도입 속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즉, IFRS는 단순히 회계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경제 철학이 반영된 제도적 결정이다.

 

각국이 IFRS를 받아들이는 속도가 다른 이유

2. 제도와 법체계의 차이 

IFRS 도입 속도의 차이를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법체계의 구조다.
IFRS는 원칙 중심(principle-based)의 기준이다.
이는 개별 거래를 세세히 규정하기보다, 경제적 실질(economic substance)을 우선시하는 방식이다.
이 접근법은 영미권 국가(common law system) 와 잘 맞는다.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은 회계기준이 기업의 판단에 기반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투자자 보호 중심의 자본시장 구조를 갖추고 있다.
반면 법률 중심(code law system) 국가, 즉 독일, 프랑스, 일본, 한국 등은
회계가 법률과 세무 규정의 일부로 묶여 운영되어 왔다.
이런 국가에서는 법적 확실성이 중요하기 때문에, IFRS처럼 해석과 판단의 여지가 큰 원칙 중심 기준은
법적 분쟁과 규제 불안을 초래할 수 있다.
따라서 법체계가 엄격한 나라일수록 IFRS 도입이 느릴 수밖에 없다.
이는 단순히 회계의 기술적 차이가 아니라, 법문화와 사회적 신뢰의 수준에 따른 차이이기도 하다.
즉, “규칙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일수록 IFRS의 유연성은 오히려 부담으로 작용한다.

 

3. 경제·정치적 이해관계의 차이 

IFRS는 ‘국제 기준’이지만, 국가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도입 속도가 달라진다.
자본시장이 개방된 선진국일수록 해외 투자자의 요구에 따라 IFRS 채택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EU는 단일 자본시장을 구축하기 위해 IFRS를 조기 도입했고,
싱가포르나 홍콩은 글로벌 금융허브로서 외국인 투자자 신뢰 확보를 위해 신속히 수용했다.
반면, 내수 중심 경제를 가진 국가나 정부가 기업회계를 통제하려는 구조에서는
IFRS 도입이 더디게 진행되거나 부분적으로만 적용된다.
중국의 경우, 국가회계기준(CAS)을 IFRS와 유사하게 설계했지만,
실제 적용은 여전히 정부의 감독하에 이뤄지고 있다.
이는 회계가 단순한 기업정보의 언어가 아니라 국가 통제와 정책수단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IFRS를 제정하는 국제회계기준위원회(IASB)가
영미권 중심으로 운영된다는 점도 일부 국가들이 IFRS 도입에 신중한 이유다.
회계기준의 통일이 결국 경제주권의 일부를 국제기구에 넘기는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따라서 IFRS 도입의 속도는 기술적 적응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적 자율성과 주권의 문제로도 이어진다.

 

4. 문화적 요인과 회계의 철학 

회계기준 도입의 배경에는 문화적 가치관도 깊게 작용한다.
IFRS는 투명성과 신속한 정보공시를 강조한다.
그러나 모든 사회가 동일한 ‘정보 공개’ 문화에 익숙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서구 사회는 개인 책임과 정보 공개를 중시하지만,
동양권은 조화와 관계 유지, 내부적 조정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 차이는 회계의 철학적 접근에도 영향을 준다.
보수주의(conservatism)를 중시하는 회계문화에서는 손실은 즉시 인식하고,
이익은 신중하게 인식하려는 태도가 강하다.
반면 IFRS는 실질 중심의 중립적 정보 제공을 강조한다.
이러한 철학의 충돌은 회계기준 전환의 저항으로 이어진다.
또한 사회적 신뢰 수준이 낮은 국가에서는
판단 중심의 IFRS보다 규칙 중심의 구체적 기준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판단의 여지”는 부정과 조작의 가능성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결국 IFRS의 도입 속도는 기술이나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그 사회가 얼마나 신뢰를 기반으로 운영되는가에 달려 있다.
신뢰가 높은 사회일수록 원칙 중심의 자율적 회계가 가능하고,
신뢰가 낮은 사회일수록 세부 규정과 통제가 강화된다.